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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이름 아래 놓친 아이 인생의 이벤트.알아야 이해하니 기웃대고 다가가야마흔의 임신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고령 임신과 노산 엄마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2007년 나이 마흔에 둘째를 낳은 노산 1세대로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현실을 기록합니다.<기자말>
아침에 눈을 뜨면 뉴스보다 SNS 쇼츠를 먼저 훑는다.같은 춤을 두 명이 추고,조금 뒤에는 다섯 명이 춘다.오호,요즘 챌린지구나.오정세가 몇 번 지나간 화면에는 류승룡이 단발머리 분장을 한 채 '니가 좋아'를 부른다.이렇게 나는 유행을 접수한다.덕분에 식탁에서 조잘대는 딸의 수다에 진짜 리액션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옷 하나를 사도 무신사와 에이블리 앱부터 훑는다.요즘 뜨는 브랜드와 캐주얼 스타일을 눈에 담는다.덕분에 딸이 어떤 옷을 입고 나오든 놀라지 않는 강심장을 갖게 되었다.
"엄마 오늘 빈티지숍에 갈래?"
"빈티지숍?콜!"
일정만 허락한다면,딸의 제안 앞에서는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외치며 응원봉을 들고 일어난다.'빈티지숍'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에,무엇보다 딸의 데이트 신청에 들떠 무작정 따라나섰다.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커다란 매장 1·2층을 한 바퀴 돌고서야 그곳의 정체를 알아챘다.알고 보니 '구제 옷집'이었다.돌려 말하면 중고 옷,이 옷들을 눕혀 놓으면 동묘 아닌가.
나는 새 옷이 좋은 옷이고,좋은 브랜드 한 벌을 더 입히는 것이 엄마의 최선이라 여겼다.그런데 딸에게는 남이 입었던 옷도 취향과 이야기가 있는 '빈티지'였다.다소 놀라고 의아했지만,오랜 시간 갈고닦은 연기 실력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딸이 고른 옷을 계산했다.
그러자 딸은 내 팔짱을 어느 때보다 꽉 끼었다.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에서의 친구 같은 모녀의 장면이었다.이 정도면 나는 40년의 간격을 꽤 성실하게 메우고 있다고 생각했다.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그 거리를 메우지 못해 멀찍히 물러나야 했던 적도 있다.
'2026년 1월 1일 0시' 이벤트 막은 엄마
2025년 한 해의 마지막 날,해마다 그렇듯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연기대상을 보다가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해피 뉴 이어'를 외칠 참이었다.통삼겹살이 오븐에서 노릇해지고,오일 파스타가 프라이팬에서 미끄러지며 춤을 추던 순간,딸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오늘 친구들과 생맥줏집 가려고 하는데."
"생맥주?너 술 마셔본 적 없잖아."
"오늘 자정부터 성인인데 친구들이 기념식 하자고 해서.12시 땡하면 입장이 가능하대."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 전이었지만,열아홉 살이 되는 해의 새해 0시부터는 법적으로 술을 살 수 있다고 했다.친구들과 어른이 된 순간을 기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주방도구를 내려놓고,갑자기 걱정 한 솥을 올려 끓이기 시작했다.밤 12시에 스터디카페에 있던 적은 있어도 생맥줏집은 처음이었다.뉴스에서 보던,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운 학생의 모습까지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안 된다고 했다.늦은 밤이고,술도 처음이고,위험하다는 이유를 숨도 쉬지 않고 늘어놓았다.딸은 술을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고 했고,나는 그래도 술집은 위험하다고 했다.딸은 친구들과의 기념식이 중요하다고 했고,나는 처음 마시는 술이 걱정된다고 했다.우리는 같은 식탁 앞에 서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딸은 더 조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고 나서야 마음이 걸렸다.다시 방문을 열고 내가 태워다주겠다고,근처에서 대리기사처럼 기다리겠다고 했다.그러나 딸은 괜찮다며 나가지 않았다.잠시 뒤 오븐에서는 통삼겹이 다 익었다는 신호음이 울렸지만,연말의 들뜬 기분은 이미 꺼진 뒤였다.
며칠 뒤,여동생에게 한 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요즘 아이들에게 그것이 일종의 성인식과 같은 이벤트라는 것이다.
"언니,도박묵시록술을 마시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친구들이랑 성인이 되는 순간을 같이 기다리는 거잖아.그건 애들한테 한 번뿐인 이벤트라고."
우리 딸과 동갑인 조카는 그날 자정 편의점에서 줄을 서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맥주 한 캔을 샀다고 했다.술보다도,친구들과 함께 성인이 되는 순간을 맞았다는 사실이 오래 남는 추억이 되는 모양이었다.딸에게 너무 미안했다.그렇게 아이 마음을 이해하고 친구처럼 해주겠다고 노력에 노력을 했는데,결국은 부모라는 이름 아래 아이 인생의 이벤트를 놓친 꼴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몰랐어.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주지.어떻게 해?이벤트 못해서?"
"아냐.엄마가 걱정하는 거 이해해.그동안 나 많이 이해해줬잖아."
내가 건너지 못한 40년의 틈을 그날은 딸이 한 발 건너와 주었다.세대 차이는 나이로 벌어지지만,관계는 서로의 세계를 오간 발걸음으로 좁혀지는지도 모른다.
기웃대야 들어갈 수 있는 아이의 세계
니가 좋아.니가 좋아.니가 예뻐서 좋아.
니가 좋아.좋아 죽겠어.
지난주였다.10시 타임 운동을 마치고 몇몇이 모여 티타임을 갖기로 한 날이었다.카페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는 순간,실내에 오정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우리는 동시에 빵 터졌다.누가 웃음 버튼이라도 누른 듯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데구르르 굴렀던 여고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눈은 아래로,입은 위로 반달이 되었다.
영화 <와일드씽>에서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넘기며 노래하는 오정세의 능청스러운 표정을 이야기했다.이렇게 무해한 표정과 무해한 가사의 노래가 있을 수 있냐며,우리는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주문을 외우듯 이 노래를 함께 흥얼거렸다.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4명 중 나를 제외한 3명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래서 언니는 젊어 보이나 봐.언니는 이 영화 누구랑 봤어요?"
"나?우리 딸이랑 봤지.극장에서 이 노래 나올 때 둘이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
"와~ 언니 대단한데?우리 중딩이는 이제 나와 극장은커녕 아파트 상가도 안 가려고 하는데.부럽다."
부럽다고 한 이는 윗집에 사는 노산 후배다.목소리에 중학생 딸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은 서운함과 걱정이 배어 있었다.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딸과 마흔 살 차이라는 것이다.40년은 가만히 둔다고 저절로 좁혀질 거리가 아니었다.안 그래도 자신 없고,괜히 한 발 늦은 것 같은 노산 엄마에게 그 숫자는 그냥 나이 차이가 아니었다.아이가 사는 세계에 들어가려면 조금 더 기웃거려야 하는 거리였다.
다음에 윗집 동생이 아이가 멀어지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하면 빈티지숍 데이트보다 생맥줏집 사건을 더 자세히 말해줄 것이다.잘하려고 애써도 엄마는 가끔 엉뚱한 곳에서 들통난다고.마흔 살의 거리는 단번에 좁혀지지 않지만,아이 쪽으로 걸어간 시간은 관계 속에 남는다고.
오늘도 마흔 살 많은 엄마는 딸의 방문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웃거린다.
니가 좋아,니가 좋아.좋아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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